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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5. 길르앗 야베스와 사울 왕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4-28 14:50
조회
8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5. 길르앗 야베스와 사울 왕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과 다윗의 축복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야훼께 복을 받을지어다"(삼하 2:5)


세찬 바람에 곧 쓰러질 듯 몸을 숙이던 갈대는 잔잔해진 바람에 사군자 마냥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하지만 이내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 어느 방향인지 묻지도 보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떨군다. 권력 앞에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요동친다.

사울의 죽음 이후 대세는 이미 다윗에게 기울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다투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리겠다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죽임을 당한 아말렉 청년도 있었다(삼하 1:10~15). 그러나 사울의 처참했던 시체를 수습하고 그의 죽음을 끝까지 애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다.

사무엘하 2장 5절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사울의 장례를 치르고 끝까지 사울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았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다윗의 칭찬과 축복의 말이다. 하지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다윗에게 괜한 오해와 미움을 살 수 있었음에도 왜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 끔찍했던 사울의 죽음

사울 왕의 등극은 이스라엘의 큰 전환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의 뜻을 따라 나라의 대소사들을 결정하던 신권정치제(神權政治制, theocracy)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원칙에 입각한 원시 군주제(君主制, monarchy)로 전환된 것이다. 사울 왕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지냈다. 불안한 왕권을 가지고 시작했지만(삼상 10:26~27) 암몬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삼상 11:11~15).

사울은 자기의 고향인 기브아(Gibeah)를 이스라엘의 초대 수도로 정하고 모압 암몬 에돔 블레셋 아말렉 등과 같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국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물론, 사울 왕이 이방 민족들을 다 섬멸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사울 왕은 그의 재임 기간 중 많은 시간을 군사력을 동원해 다윗을 제거하고자 쫓아다니는 데 허비했다. 다윗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그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죽음 또한 비참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울의 죽음은 단순히 전쟁 중에 자살로 끝난 것은 아니다.

사무엘상 31장 9절에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튿날 전리품을 취하려 전장에 다시 나타났다. 그때 사울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삼상 31:8~9) 죽은 사울의 목을 잘라 블레셋 여러 지방으로 보냈다. 사울의 머리는 조롱거리와 승전의 상징으로 블레셋 여러 지방을 떠돌다 돌아와 다곤 신전에 매달렸다(대상 10:10). 그의 갑옷은 블레셋의 다산과 전쟁의 신인 아스다롯의 집(신당)에 진열되었다(삼상 31:10). 그의 시체는 목이 없는 채로 벧산 성벽에 그의 세 아들 시신과 함께 못 박혀 걸려 있었다(삼상 31:10~12).

2. 길르앗 거민과 사울의 인연

사울과 길르앗 야베스 주민과의 관계는 사울의 재임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왕정이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앙집권적인 결속력을 갖지 못했다. 여러 명의 사사에 의해 국지적으로 다스려졌고 대부분 지파의 장들이 책임을 지는 지방분권적 체제였다. 길르앗 야베스는 갈렙 자손들이 점령한 땅이었다(대상 2:50~55).

사울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것이다. 사울이 왕이 된 이후지만 아직 중앙집권적 통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은 암몬 족속의 왕인 나하스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그를 섬기고자 했다(삼상 11:1). 하지만 나하스는 화친의 조건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다 빼는 것을 제시했다(삼상 11:2).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는 단순히 협박에 그치지 않고 종종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런 암몬 족속의 위협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선택은 궁색함 그 자체였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면 나하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삼상 11:3).이 소식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들었던 시점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삼상 11:5). 이미 사무엘상 10장에서 왕으로 공포되었던(삼상 10:24) 사울이 소를 몰고 있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정체제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아가 암몬 족속들을 전멸시켰다(삼상 11:11). 이것이 40년 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에게 입었던 은혜였다.


3.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의로운 선택

40년 후 블레셋 진영의 벧산 성벽에 사울의 시신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수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해 가지고 왔다(삼상 31:12).

'밤새도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벧산은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약 20㎞ 떨어진 지역으로 밤길을 아주 빠르게 5시간 이상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밤을 선택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물리적인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은 매장이었다. 율법은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만 화장(火葬, cremation)을 허용하고 있었다(레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화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삼상 31:12) 그만큼 시체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들의 장막 밖에서 화장을 하고 그 뼈를 가져다가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7일 동안 금식하며 그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사울에 대한 예를 다했다(삼상 31:13).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사울의 죽음에 대해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의로운 선택이었다.

다윗은 이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을 진심으로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유골을 사울의 가족묘가 있던 베냐민 땅 셀라에 이장함으로써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장례를 완성했다(삼하 21:12~14).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감)

출처 : http://fgnews.co.kr/front/view.do?first_category_id=3&second_category_id=266&id=123799&renew=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