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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6. 예수님의 눈물과 제1차 유대-로마전쟁(A.D. 66~7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4-02-11 13:31
조회
5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6. 예수님의 눈물과 제1차 유대-로마전쟁(A.D. 66~7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철저히 파괴될 예루살렘 예견한 예수님의 통곡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1)

성경은 세 번 예수님께서 우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첫째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우셨고(요 11:33~35), 둘째 잡히시기 전날 감람 산에서 우셨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은 예수님께서 감람 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의 기도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 곧 일어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예루살렘성의 철저한 파괴로 인해 우셨다(눅 19:41).

'우셨다'는 헬라어 단어로는 '클라이오'가 쓰였고,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울다'(눅 7:38) '곡하다'(요 11:31)로 사용된 것을 볼 때 '흐느꼈다'는 의미가 아니라 큰 슬픔으로 인해 통곡하셨다는 의미이다. 예루살렘의 참혹한 파괴와 잔혹한 살육은 주후 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A.D. 66~73년) 중에 일어났다.


1. 예루살렘의 파괴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유대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유대전쟁사』(War of the Jews)에 의하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 약 27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은 110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들을 볼 때 1세기 예루살렘 인구는 4만 5000명~5만 명 정도였고 순례자들까지 포함한다고 해도 그 당시 예루살렘은 1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요세푸스가 일일이 인구를 센 것이 아니기에 270만 명의 인구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예루살렘 인구의 약 5분의 2정도가 희생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이후 로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0년 7월 12일 ~ B.C. 44년 3월 15일) 때부터 유지하던 유대인의 율법과 생활방식을 존중하던 관용 정책을 폐지하고 혹독한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소수를 제외한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들은 대부분 로마 지배 계층의 노예로 선물되거나 검투사로 전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했다.

예루살렘을 함락했던 티투스는 약 2500명의 유대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쫓겨 다니다 죽게 했으며 로마인들은 이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도 박탈되어 유대인의 법 행정 종교의 중심이었던 산헤드린의회가 해산되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군중들을 선동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었다. 유대인들이 내던 성전세(Temple Tax)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로마인들의 신전인 유피테르 신전으로 보내졌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슬픔과 아픔이 임박한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실 때 우셨던 것이다.


2.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원인

주후 66년 로마 네로 황제 때 가이사라 지역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사이에 제사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일방적으로 헬라인들의 편을 들었고 중재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저항과 함께 더 나아가서 로마 시민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유대 총독이었던 제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금화 17달란트를 몰수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66년 6월 소수의 수비대로 유지되던 로마 군대를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에 로마 네로 황제는 로마군 3개 군단 6만여 명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파병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로마 군대의 파병과 예루살렘 점령은 한 해 동안 로마 황제가 4명이나 바뀌는 혼란을 겪으며 잠시 정체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 문제가 해결된 후 로마군이 유대 전역을 휩쓸었고 69년 7월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천해의 요새가 되어 있었던 예루살렘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성벽과 높은 성곽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로마군마저 허둥대게 만들었다. 이렇게 몇 차례 패배를 맛보았던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더욱 잔혹하게 예루살렘 거주민들을 유린했다.


3. 예루살렘의 파괴와 티투스의 개선문

개선문(Triumphal Arch)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황제나 장군을 환영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장군은 30살 밖에 안 된 티투스(Titus, A.D. 39년 12월 30 ~ A.D. 81년 9월 13일)였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A.D. 9년 11월 17 ~ A.D. 79년 6월 23일)였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후 티투스는 로마의 10번째 황제가 되었다.티투스아치(Arch of Titus)로 잘 알려진 티투스의 개선문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콜로세움(Colosseum)이 보이는 벨리안(Velian) 언덕에 세워져 있다. 티투스아치는 파리의 개선문을 포함한 후대에 만들어진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티투스의 개선문과 로마 건축술의 결정체로 불리는 콜로세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겐 견디기 힘든 패배의 굴욕과 혹독했던 박해의 상징이다.

몇 번의 실패를 맛본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7개월 간 포위하고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물과 양식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성 안에서 작은 먹거리에도 서로 차지하고자 큰 싸움이 일어났고 어린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

70년 8월 10일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진입했고 헤롯이 재건했던 제2성전을 불태웠으며 9월 20일까지 모든 저항 세력을 진압하고 예루살렘 성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전 기물을 약탈해 전리품으로 메고 로마로 들어오는 모습을 티투스의 개선문에 부조로 새겨 넣었다. 메노라는 히브리어로 '촛대'라는 뜻으로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형상화 한 것으로 성소에 있었던 성전 기물 중의 하나이다.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항쟁을 진압한 후 로마로 돌아와 주후 7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황제로 있었던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해 로마의 최대 휴양지였던 폼페이는 도시 전체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티투스는 황제가 된지 2년 만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으나 열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출처: http://www.fgnews.co.kr/front/view.do?first_category_id=3&second_category_id=266&id=123779&renew=001